순창원 : 매운맛이 아니다, 순회세자와 공회빈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푸르른 숲에 둘러싸여 있다.

*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실의 왕릉이다. 다섯 개의 능인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과 원, 묘도 있다. 
* 경릉은 1457년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묘이다. 덕종비 소혜왕후 한 씨(인수대비)가 후에 경릉 옆에 같이 안장되었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 성종의 아버지이고, 소혜왕후 한 씨는 성종의 어머니이다.

* 창릉은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묘이다. 
* 익릉은 19대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묘이다. 
* 명릉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 씨의 묘이다.

내부의 모습은 제사를 위한 제단과 집기들이 정돈되어 있다.  

 

 

* 홍릉은 21대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묘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은 왕의 생모, 왕세자, 빈의 무덤이다. "묘"는 대군, 공주의 무덤이다. 
"순창원"은 조선왕조 최초의 '원'인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 씨의 묘이다. 언뜻 마트에서 파는 고추장이 퍼뜩 생각남은 어쩔 수 없다.

"수경원"은 21대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묘이다. 원래 옛 연희궁 자리인 현재의 서울시 신촌동에 있었으나 1970년에 현자리로 옮겼다.
"대빈묘"는 19대 숙종의 후궁이며,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원래 경기 광주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으나, 1969년에 현자리로 옮겼다.

각 릉을 돌아보는 코스들은 녹색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요즘처럼 날씨가 최강인 날이 계속되면 경치 좋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곳을 찾게 된다. 고양시에도 찾다 보니 많은 명소들이 위치해 있다. 그중에도 서오릉은 아는 사람의 추천도 있었던 터이다. 공공장소이다 보니 오후 6시까지만 개방을 하게 돼있기 때문에 최소 5시까지는 매표를 해야만 한다. 

최근의 일몰시간은 7시 정도가 된다. 서오릉은 말그대로 다섯 개의 릉이다. 릉은 무덤이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의 왕족과 관련된 분들의 묘지이다. 묘지라고 하니까 근간에 <킹덤> <공포의 묘지> 등 같은 공포, 좀비 영화가 떠오른다. 신성한 왕족의 묘를 공포영화에 비긴다니 왠지 엇나가는 것 같기는 하다.

경릉은 의경세자인 덕종의 묘이다. 인입로가 상당히 길게 늘어서 있다. 경치는 정말 일품이다. 

킹덤은 조선시대와 같은 사극이 배경이라서 대비가 되고, 공포의 묘지는 묘지와 릉이라는 단어에서 또한 매치가 된다. 실제 방문했을때의 다섯 개의 능들은 그 구조와 형태 배치된 모습들이 거의 흡사함을 느꼈다. 맨 앞에 높은기둥의 대문과  같은 모양이라든가 드넓은 돌로 깔린 잔디를 쭉 들어가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제사를 지낼 때의 상과 제단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아마도 왕족들을 기리는 모습과 형태들은 딱히 다를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현 시대의 추모공원이나 무덤이나 그 옆의 비석 또는 납골당의 형태만 보더라도 모두 비슷하지 않던가. 물론, 우리들은 왕족이 아니라 더욱더 무덤의 형태는 같다.
커다란 산에 겹겹이 층층이 자리를 배치해 놓고 같은 크기의 묘자리에 관을 넣고 흙을 덮은 뒤 돌로 된 석관을 올린  후 그 위에 잔디인 떼를 심어서 묘의 모습을 갖추지 않는가.

좀 더 여유가 있는 부류는 좀 더 큰 비석들을 세우고 비석에도 큰 글씨로 세긴후 그 위에 멋지게 모자도 씌우고 있다. 
조선시대라고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사셨던 분들이다. 조선의 왕들 중에도 물론 세종대왕, 정조와 같은 성군이 있는 반면, 지탄의 대상이 된 부정부패의 무능한 왕들도 많지 않던가.

소나무숲길 코스를 돌아보는 길은 빠르면 10분~20분내에 그 향기안으로 빠져 볼수 있다. 

서오릉에 모셔져 있는 분들이 얼마나 살아생전에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많은 왕족들 중에 그래도 다섯 개의 릉은 아마도 지금까지 유지할 정도로 위대했다고 믿고 싶다. 무덤의 크기와 그 건축물의 웅장함이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인물이 비례하여 훌륭한 인생이었는지는 참으로 따져봐야 할 일인 것이다.

묘소의 크기가 그 사람의 진정한 그릇의 크기인가. 작금의 시대의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에 사람은 넘쳐나서 이제는 묘소의 자리가 모자라서 화장을 한 후 납골당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기이다. 누군들 자기 친인척의 묘소를 서오릉처럼 폼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겠는가.

인성대군의 초장지이다. 제주의 돌하루방처럼 생긴 돌대군이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다.

하지만 하고 싶어도 이제는 그런 땅이 모자른 실정이다. 겉모습으로만 화려하게 보일게 아니라, 진정 훗날의 자식들이 조상을 진심으로 머리 숙여 존경하고 싶게끔 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오릉을 발길을 조금 빠르게 한다면 한 시간여 정도면 풍경과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녹색으로 우거진 소나무숲길을 걷다보면 조선시대의 선열들이 열심히 나라를 지켜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걷고 있음을 느낀다면 정말 뿌듯해진다. 훌륭한 업적을 남겨서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분들의 모습들을 상상해보면서 산책을 즐긴다면 좋은 발걸음을 한 것이라 본다. 

 

서오릉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 ⑴ 경릉:세조(世祖)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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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옆의 멋진 철골 구조물의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

안양은 알고 보니 집 근처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가끔 지방에 갔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의왕과 안양을 거쳐서 가기 때문이다. 안양시 석수동 근처에는 이케아,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롯데시네마 아울렛, 코스트코 등 대형 쇼핑몰과 마트가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어 더없이 편리하다. 

안양 예술공원으로 가는 거리는 문화의 거리라고 되어있어서 등산객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이다. 거리 양쪽으로 음식점들이 계속 늘어서 있어서인지 도로 쪽으로 주차를 해놓아서 통행하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중앙에 개천이 흐르는데, 초록색으로 우거진 나무들에 폭 쌓여있어서 마치 숲을 통과하는 듯하다. 

개천 양쪽으로 울긋불긋한 꽃들이 심어져 있어서, 차를 몰고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왠지 밑지는 듯한 생각이 든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걸어서 개천을 따라 올라가 보는게 낫겠다. 향기로운 꽃들의 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걸어서 가는 기쁨이 더없이 좋을 듯하다. 

예술공원을 지나 염불사 사찰을 올라가는 길은 부처님오신날의 전등과 함께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주차장이 따로 있는데, 두시간에 약 삼천 원 정도의 요금이 예상된다. 10분당 300원 정도씩이다. 주차장 근처에는 식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아이들 재롱에 한창 재미가 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도 행복하다. 5층 이상의 식당들 옆에 녹색의 물이 흐르고 날씨는 더없이 푸르다.

바람 또한 살살 불어 등산과 산책에 제격이다. 주차장에는 기이한 모형의 동그란 철로 만든 통로 길이 놓여져 있다. 왠지 한국말이 아닌 동남아 언어를 하는 외국인들이 종종 보인다. 서로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안양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지 좀 놀라웠다. 바로 산으로의 등산코스가 이어진다.

아마도 관악산 줄기하고 이어지고 있다. 무작정 숲 속의 청량함을 느끼고자 곧바로 산을 타고 약 20분 이상을 등산을 하는데 왠지 이대로 가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다. 간간히 반대편에서 등산객들이 출몰하기는 하는데, 직진을 할수록 인적이 점점 드물다.

염불사를 올라가기 위한 첫관문에는 많은 꽃들과 형형색색의 꽃등이 둘러쌓여 있다.

예전에 전라도 해남쪽의 두륜산을 오후 늦게 등산을 했던 기억이 퍼뜩 들었다. 가파른 고갯길을 등산하다 보니 인적이 드물었고, 날씨도 검게 구름이 몰려들어 금방 어두워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하산을 달리기 하듯이 내려왔던
공포의 기억이었다.

여하튼 산행을 혼자 늦게 오르는 것은 웬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라 느껴진다. 해서 다시 하산을 결정했다. 어느 정도 내려왔을 때 오른쪽으로 시멘트 길이 나왔는데, 그 길이 염불사로 오르는 길이었다. 약 1킬로 내외여서 도전해 볼만한 거리였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계속되는 오르막이라서 숨이 많이 차오른다. 또한 위아래로 차들이 간간히 다니다 보니까 안전도 고려해야 한다. 형형색색, 오색찬란한 등산복의 등산객들이 벌써 밝은 미소로 하산들을 하고 있다. 염불사보다 더 위쪽으로 또 사찰이 있는데 시간상 그곳까지는 어려울 듯하였다.

기암괴석의 병풍같은 풍경을 등뒤로 세개의 불상들이 널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올라가는 중간에 식당들이 나오고 벌써 등산객들이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면서 웃음소리가 떠들썩하다. 식당 옆에는 족구장도 있어서 친목도모에 아주 그만인 모습들이다. 머리와 등에 어느 정도 땀이 배어 올라온다. 염불사 가까이 다가가니 어디선가 벌들의 날갯짓소리가 왱왱거린다.

이 맑은 날에 벌들도 등산을 왔나 보다 했더니 웬걸 하늘 높이 드론 한대가 날고 있지 않은가. 조용히 수행하시는 승려분들에게 조금은 실례되지 않을까 한다. 절은 절답게 조용하고 사색하고 구경할 수 있는 분위기를 느끼려 오는 것 아닌가. 드론을 조종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왠지 좀 불편하다.

곧 다가올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 꽃과 연등이 등산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더 넓은 광장에서 날리는 게 낫지 않을는지.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대웅전의 웅장한 모습과 함께 부처님 오신 날을 알리는 오색빛깔의 등불들을 쭉 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명산에나 괜찮은 사찰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곳 안양의 산자락에도 이렇게도 경치 좋은 풍경을 제공해 주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했다.

키 큰 불상들이 몇 개씩이나 중간중간에 배치되어 있다. 따뜻한 5월의 햇살 아래에 제일 꼭대기까지 오밀조밀하게 돌계단들이 놓여있다. 이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들이 만들어낸 절묘한 절경을 보고 스마트폰 셔터를 안 누를 수가 없다. 불교에 귀의하면 매일매일 이 멋진 풍광과 함께 일생을 같이 한다니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물론 승려의 일상은 과히 우리 서민들처럼 녹록지는 않지만 말이다. 네모 반듯한 시멘트로 만든 도시의 꽉 막힌 사무실 안에서 모니터만 쳐다보다가 이렇게 근교의 멋진 사찰의 모습을 보니 정말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산하기가 싫어질 만큼 그런 정도이다. 

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더없는 멋진 장관이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하다.  

신발을 좀 얇은 운동화를 신고 왔더니, 이런 강행군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다. 멋진 경관을 이 두 눈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하려 하니 발가락이 좀 아픈 거는 참을 수 있을 듯했다. 등산에는 좀 두툼한 양말과 등산용의 운동화를 신어야 후회를 안 하겠다 또 한 번 느낀다.

하체운동 제대로 하는구나 느끼면서 이마의 땀을 훔친다. 근처에 박물관 하고 또 다른 볼거리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미 몸은 방전이 많이 되어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것까지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제한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봐야겠다는 욕심은 지나고 보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리라 항시 느낀다.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보고 느끼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유를 가지고 오늘 안되면 다음에 한번 더 오리라 마음먹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마음을 잡으니 좀 맘이 편안하다. 촉박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뛰다시피 할 것 까지는 없는 것이다. 안양예술공원과 염불사 따뜻한 햇살이 비치면 한번 나들이를 계획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상당한 높이의 부처의 인자한 모습에 절로 마음이 평화스러워진다.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은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주변의 전통사찰 및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어 과거 수도권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으며, 안양의 명물로 이름을 떨쳤던 포도가 오가는 이의 미각을 돋우어 주었던 곳이다. 삼성천 계곡의 울창한 숲 사이로 여러 등산로가 있어 지금도 시민들의 등산 코스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한 안양사, 염불암 등 전통사찰과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당간지주를 비롯해 석수동 마애종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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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 그 풍부한 역사를 위하여 

1. 북미관계의 이상한 기원 : 책임지는 정부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 창비 발행 

* 푸에블로호는 경 수송함으로 사용하다가 폐기된 것을 다시 개조하여, 그 성능은 상당히 노후화되었고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배 중앙에는 정보수집에 필요한 첨단 기계를 갖춘 특별작전부실이 있었다.

* NSA(National Security Agency, 국가안보국) 는 미국의 모든 신호정보 수집과 처리를 담당하는 기구로, 한국전쟁 때 남침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던 이유로 창설되었다. 통신장비, 항공사진, 위성 등의 장치를 이용해 기술적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다.

* 북한의 청진 근처에서 정보수집 중 북한의 대잠함과 세척의 어뢰정에 포위되어 나포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사격수 호지스가 총격에 사망했다.
* 미국 해군의 배가 적군에 나포된 것은, 1815년 프레지던트호가 영국 해군에 나포된 이후 처음이다.

일반 구축함의 3분의 1크기의 푸에블로호, 성능면에서 한참 뒤떨어진 고물배였다.

* 미국의 역사학자 미첼 러너는 나포 사건의 원인을 첩보작전의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허술하게 작전을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과소평가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은 소련을 우두머리로 해서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는 냉전적 관념이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나포에는 소련의 개입이 없었음은 명확하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 정보수집 중이던 푸에블로호에 1.21 사태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만일, 제대로 전달됐다면 북한 해안에서 떨어져 작전을 했을 거라고 부처 함장은 증언했다.

* 나포가 발생하자 미국은 전투기 155대를 한반도에 추가 배치하였다. 
*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건물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존스미스 제독, 공산 측 박중국이 비밀리에 만났다. 
박중국은 푸에블로호가 유엔군사령부 소속이 아니라 태평양 함대 소속이라고 말하고, 유엔군사령부와는 상관없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사이의 회담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국가적 차원의 협상으로 말하는 것은 미국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사례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는 북한 외교의 성과 또는 승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었다.

가운데 손가락은 하와이식 인사법이라고 둘러댔다가 오히려 고문을 더 당하게 되었다.

* 푸에블로호 회담을 군정위 두 수석대표 간의 비공개 회담(closed meeting) 또는 사적인 회담(private meeting)이라 부른다.
* 북한이 미국에 강요한 사과문의 내용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정식 국호가 무려 10번이나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이처럼 미국이 자신의 국호를 불러주고 인정해주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집요하게 이끌어 내려했다. 

* 북한이 김일성의 능력과 미국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선전하기 위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활용한 것이다. 
* 위기를 조성해야 협상이 시작된다는 북미관계의 이상한 공식도 최근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다. 
* "북한에 대해 미국이 갖고 있는 최고의 영향력은 미국과 완전한 관계 개선을 하고자 하는 북한의 욕망이다" -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회고록에서

▶ 당시 북미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상상된다. 미국은 나포사건의 결과로써 선언문에 어찌돼었든 서명을 하였다. 이는 상당히 굴욕적인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 닉슨 정부는 북한에 대해 승리를 이루는 쾌거를 선택하지 않고 그 대신 더 큰 선원들의 무사귀환을 이루어 냈다.

 

 

북미 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결국 풀려나는 푸에블로호 선원들 (사진=대한뉴스)

잠깐의 승리보다 국민의 안위를 우선순위에 둔 민주정치의 최고이상향을 실행한 것이다. 이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타 자칭 민주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에게 경종과 교훈을 준다. 국가적 대의보다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정책은 민주적 정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준 실례인 것이다.

반면 북한은 오히려 미국의 보복폭격을 암시하는 극한 상황의 위험을 짊어지면서까지 주민의 안위를 노출시키고 사과문을 어떻게든 받아 들어서 승리를 한 것처럼 자축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미련하고 초라한 행태인가 말이다. 오직 자신들의 선전만을 위한 정책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정치의 행태를 보면, 여당과 야당 간에 숱한 몸싸움과 무조건적인 듯한 반대의견 등으로 한마디로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는 날이 없다. 민주적인 정부란 무엇인가, 실로 국가의 국민을 위한 정치, 국민의 제일 아픈 고통의 목소리를 최대한 받아들여 국민의 행복과 안위와 의견을 먼저 듣는 그러한 정책은 언제쯤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여당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야당은 있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건강한 서로 간의 반대의견은 얼마든지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행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그닥 곱지 만은 않은 게 보인다. 국민의 진실된 지지를 잠시 받았다고 다가 아니지 않을까.

그 당시 그 때의 그 초심의 가슴 벅차고 희망찬 새 출발의 거대한 마음가짐을 5년간 이어나갈 수는 없는 것인지. 작금의 상황에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국민의 의견과 안위와 생명을 우선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정부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싶다. 

 

민주주의 잔혹사

1987년 6월항쟁 30주년, 그날의 기억그리고 현대사 곳곳에 남은 우리들의 기록들박종철의 동기들이 쉰 살 언저리쯤 되었을 때 세월호가 물에 가라앉았고, 그들의 아들딸 나이쯤 되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물속에 잠겼다. 유족들은 보상보다도 진실을 규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때도 지금도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이 놓여 있다.6월항쟁 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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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yes24,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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