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 그 풍부한 역사를 위하여 

1. 북미관계의 이상한 기원 : 책임지는 정부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 창비 발행 

* 푸에블로호는 경 수송함으로 사용하다가 폐기된 것을 다시 개조하여, 그 성능은 상당히 노후화되었고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배 중앙에는 정보수집에 필요한 첨단 기계를 갖춘 특별작전부실이 있었다.

* NSA(National Security Agency, 국가안보국) 는 미국의 모든 신호정보 수집과 처리를 담당하는 기구로, 한국전쟁 때 남침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했던 이유로 창설되었다. 통신장비, 항공사진, 위성 등의 장치를 이용해 기술적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이다.

* 북한의 청진 근처에서 정보수집 중 북한의 대잠함과 세척의 어뢰정에 포위되어 나포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사격수 호지스가 총격에 사망했다.
* 미국 해군의 배가 적군에 나포된 것은, 1815년 프레지던트호가 영국 해군에 나포된 이후 처음이다.

일반 구축함의 3분의 1크기의 푸에블로호, 성능면에서 한참 뒤떨어진 고물배였다.

* 미국의 역사학자 미첼 러너는 나포 사건의 원인을 첩보작전의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허술하게 작전을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과소평가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은 소련을 우두머리로 해서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는 냉전적 관념이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나포에는 소련의 개입이 없었음은 명확하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 정보수집 중이던 푸에블로호에 1.21 사태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만일, 제대로 전달됐다면 북한 해안에서 떨어져 작전을 했을 거라고 부처 함장은 증언했다.

* 나포가 발생하자 미국은 전투기 155대를 한반도에 추가 배치하였다. 
*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건물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존스미스 제독, 공산 측 박중국이 비밀리에 만났다. 
박중국은 푸에블로호가 유엔군사령부 소속이 아니라 태평양 함대 소속이라고 말하고, 유엔군사령부와는 상관없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사이의 회담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국가적 차원의 협상으로 말하는 것은 미국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사례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는 북한 외교의 성과 또는 승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었다.

가운데 손가락은 하와이식 인사법이라고 둘러댔다가 오히려 고문을 더 당하게 되었다.

* 푸에블로호 회담을 군정위 두 수석대표 간의 비공개 회담(closed meeting) 또는 사적인 회담(private meeting)이라 부른다.
* 북한이 미국에 강요한 사과문의 내용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정식 국호가 무려 10번이나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이처럼 미국이 자신의 국호를 불러주고 인정해주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집요하게 이끌어 내려했다. 

* 북한이 김일성의 능력과 미국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선전하기 위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활용한 것이다. 
* 위기를 조성해야 협상이 시작된다는 북미관계의 이상한 공식도 최근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다. 
* "북한에 대해 미국이 갖고 있는 최고의 영향력은 미국과 완전한 관계 개선을 하고자 하는 북한의 욕망이다" -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회고록에서

▶ 당시 북미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상상된다. 미국은 나포사건의 결과로써 선언문에 어찌돼었든 서명을 하였다. 이는 상당히 굴욕적인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 닉슨 정부는 북한에 대해 승리를 이루는 쾌거를 선택하지 않고 그 대신 더 큰 선원들의 무사귀환을 이루어 냈다.

 

 

북미 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결국 풀려나는 푸에블로호 선원들 (사진=대한뉴스)

잠깐의 승리보다 국민의 안위를 우선순위에 둔 민주정치의 최고이상향을 실행한 것이다. 이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타 자칭 민주국가라고 하는 나라들에게 경종과 교훈을 준다. 국가적 대의보다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정책은 민주적 정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준 실례인 것이다.

반면 북한은 오히려 미국의 보복폭격을 암시하는 극한 상황의 위험을 짊어지면서까지 주민의 안위를 노출시키고 사과문을 어떻게든 받아 들어서 승리를 한 것처럼 자축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미련하고 초라한 행태인가 말이다. 오직 자신들의 선전만을 위한 정책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정치의 행태를 보면, 여당과 야당 간에 숱한 몸싸움과 무조건적인 듯한 반대의견 등으로 한마디로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는 날이 없다. 민주적인 정부란 무엇인가, 실로 국가의 국민을 위한 정치, 국민의 제일 아픈 고통의 목소리를 최대한 받아들여 국민의 행복과 안위와 의견을 먼저 듣는 그러한 정책은 언제쯤 제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여당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야당은 있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건강한 서로 간의 반대의견은 얼마든지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행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그닥 곱지 만은 않은 게 보인다. 국민의 진실된 지지를 잠시 받았다고 다가 아니지 않을까.

그 당시 그 때의 그 초심의 가슴 벅차고 희망찬 새 출발의 거대한 마음가짐을 5년간 이어나갈 수는 없는 것인지. 작금의 상황에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국민의 의견과 안위와 생명을 우선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정부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싶다. 

 

민주주의 잔혹사

1987년 6월항쟁 30주년, 그날의 기억그리고 현대사 곳곳에 남은 우리들의 기록들박종철의 동기들이 쉰 살 언저리쯤 되었을 때 세월호가 물에 가라앉았고, 그들의 아들딸 나이쯤 되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물속에 잠겼다. 유족들은 보상보다도 진실을 규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때도 지금도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이 놓여 있다.6월항쟁 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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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yes24,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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